마음이 아픈데 병원에 못 가는 이유 — 정신건강 낙인의 실체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이다원
"설마 내가 정신과까지 가야 하나." 잠을 못 이루는 밤이 길어지고, 출근길이 점점 무거워져도 이 한마디가 발목을 잡는 경우가 많습니다. 혼자만의 고민이 아닙니다. 한국 성인의 정신장애 평생유병률은 27.8%, 4명 중 1명꼴입니다. 그런데 지난 1년간 실제로 정신건강 서비스를 이용한 비율은 7.2%에 그칩니다. 미국 43.1%, 호주 34.9%와 비교하면 현저히 낮은 수치입니다.
왜 이렇게 많은 사람이 도움을 구하지 못할까요. 연구에 따르면 가장 큰 장벽 중 하나는 '낙인(stigma)'입니다. Corrigan과 Watson의 2002년 연구는 낙인을 세 가지로 구분합니다. 첫째, 사회가 정신질환에 대해 갖는 고정관념이 편견과 차별로 이어지는 공적 낙인. 둘째, 그 편견을 스스로 받아들여 "나는 약한 사람"이라고 여기게 되는 자기 낙인. 셋째, "정신과 환자"라는 꼬리표가 두려워 아예 서비스를 피하는 꼬리표 회피입니다.
144개 연구를 종합한 Clement 등의 2015년 메타분석은 낙인이 도움 요청에 소에서 중 규모의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특히 "내 기록이 알려질까 봐"라는 정보 노출 우려가 가장 자주 보고된 장벽이었습니다.
한국에서는 이 문제가 더 복잡해집니다. 체면 문화 속에서 정신건강 문제는 개인의 일로 끝나지 않고 가족과 가문 전체의 체면에 영향을 줍니다. 세계은행 2024년 보고서는 한국을 포함한 동아시아 사회에서 낙인이 가족 단위로 확장되는 현상을 지적합니다. "가족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치료의 문턱을 한층 더 높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벽을 낮추려면 어디서부터 시작할 수 있을까요. 미국 국립학술원(National Academies)의 2016년 보고서에 따르면, 낙인 감소에 가장 효과적인 전략은 정신건강 문제를 경험한 사람과의 직접 접촉, 그리고 올바른 정보에 기반한 교육입니다. 거창한 캠페인이 아니더라도 주변에서 어려움을 이야기하는 사람의 말에 귀 기울이고, "정신병자"가 아니라 "정신건강 문제를 겪고 있는 사람"으로 표현을 바꾸는 것만으로도 변화의 시작이 될 수 있습니다.
마음이 힘든데 병원에 가는 것이 망설여진다면, 그 망설임 자체가 자연스러운 감정이라는 점을 먼저 인정해 보시길 권합니다. 증상이 2주 이상 지속되거나 일상에 지장이 생길 정도라면,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와 상담하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참고 출처
- 2021년 정신건강실태조사 — 보건복지부
- Understanding the impact of stigma on people with mental illness — Corrigan & Watson (2002), World Psychiatry
- What is the impact of mental health-related stigma on help-seeking? — Clement et al. (2015), Psychological Medicine
- Ending Discrimination Against People with Mental and Substance Use Disorders — National Academies (2016)
